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 힐 (문단 편집) == 생애 == 1879년, 요엘 임마누엘 해글룬드 (Joel Emmanuel Hägglund) 라는 이름으로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죽은터라 그의 집안은 경제적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그 자신은 청년기에 폐결핵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기는 등 상당히 불우하게 살았다. 그러던 차에 1902년 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기서 그는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떠돌이]] [[노동자]]로서 몇 년을 보냈다. 1910년이 되자 그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에 가입하며 인생에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이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들의 노동운동과 파업을 지지했고, 많은 수의 [[민중가요]]를 작곡하고 불러 힘을 실어주었다. '''그의 노래들은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로 가득 차 있었다.''' 1913년 말부터 힐은 IWW에서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솔트레이크 시티]] 부근에서 직장을 다녔다. 헌데 1914년 1월 초에 그가 일하던 곳 부근의 식료품점 주인과 그 아들이 붉은 색 [[반다나]]를 쓴 무장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터졌다. 마침 힐이 총상[* 총알이 왼쪽 폐를 관통한 상태였다.]을 입은 채로 병원을 다녀갔기에 경찰은 그를 의심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게 신원 미상의 여성과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총에 맞았다고 증언했으나 그가 다녀간 병원의 의사는 그가 [[권총]]으로 무장 중이라고 했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붉은 색 [[반다나]]를 발견했다. 힐은 줄곧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하지만 경찰은 그를 [[살인죄]]로 기소했다. 하지만 그를 살인범으로 단정 짓기에는 석연찮은 점들이 많았다. 일단 조 힐이 기소된 이유는 12명의 목격자가 그를 보고 '범인과 닮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조 힐은 식료품점 주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여서, 피해자 유가족이 처음 그를 보고 범인이 아니라고 하기도 했다.[* 다만, 이 말은 나중에 번복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범행도구로 여겨지던 피스톨을 경찰은 발견하지 못했다. 범행현장에서는 총에 맞았다는 그의 혈흔도, 그를 관통했다던 총알도 발견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를 제외하고도 사건이 발생하던 날에 총상을 입은 사람은 4명이 더 있었다. 한편 무엇보다도 그는 '''정부 당국이 골치 아파하는 노동운동가이자 [[민중가요]] 가수'''였다. 이런 그의 신분은 마치 그가 탄압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실제로 변호인이 그가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소속이기에 [[유죄]] 판결이 나올 것이라며 푸념할 정도였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각계 여러 층에서 힐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재미 [[스웨덴]] 대사, 유타대학교 학생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회원들, [[헬렌 켈러]] 등은 당시 미국 대통령과 유타 주 주지사에게 그의 무죄 혹은 선처를 탄원하였다. 하지만 정부 당국은 요지부동이었고 이들의 노력을 '간섭'으로 일축했다. 결국 힐은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언도받았다. >나의 유언은 간단하다. >나눠 가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료들이여, 안타까워하고 슬퍼할 필요 없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내 몸? 오!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한 줌의 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상큼한 바람이 나의 재를 >어딘가 꽃이 자라는 곳으로 날려 보낼 수 있게 해 달라. >그러면 지는 꽃들도 >생기를 얻어 다시 피어날 것이다. > >이것이 나의 마지막 그리고 최종 유언이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 >처형 전 날, [[조 힐]]이 적은 글귀 체포된 이후 힐은 2년 가까이 감옥에서 지냈다. 여기서도 그는 집필과 작곡을 멈추지 않았으며, 동지들에게 편지를 써서 용기를 복돋워 주었다. 노동운동가들과 노동조합원들에게 '''"슬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오. 조직하시오!"'''란 전보를 써 보내기도 했다. 힐은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당할 상황에서 차라리 자신이 '노동운동의 [[순교자]]'가 되는 것이 노동운동에 더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고도 편안하게 판결을 수용했고, 결국 1915년 11월 19일 사형당했다. 그의 장례식은 [[시카고]]에서 열렸고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